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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역사를 바꾼 스승과 제자, 조훈현과 이창호 그리고 영화 ‘승부’

바둑 역사를 바꾼 스승과 제자, 조훈현과 이창호 그리고 영화 ‘승부’

바둑계의 거장, 조훈현과 이창호

한국 바둑사를 논할 때 조훈현과 이창호의 이름은 결코 빠질 수 없다. 이 두 사람은 각자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독특한 인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훈현은 한국 바둑의 수준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국보’라 불렸고, 이창호는 그 조훈현을 넘어선 ‘돌부처’로서 세계를 제패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바둑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올 만큼 다양하고 깊이가 있다.

조훈현: 전설의 시작

조훈현 9단은 1953년생으로,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에 걸쳐 본격적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파로서 기초부터 다져진 탄탄한 기력, 그리고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직관과 집념으로 그는 국내외 대회를 휩쓸었다. 특히 국내에서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활약을 이어갔다.

조훈현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바둑계에 프로 시스템 도입을 선도하고, 후기엔 스스로 세계 무대로 진출해 중국과 일본의 정상 기사들과 대등한 승부를 벌였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한국바둑 르네상스’라 할 만한 시대를 연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창호: 조용한 혁명가

이창호 9단은 1975년생으로, 조훈현의 제자이자 바둑 역사상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조훈현이 한국 바둑의 초석을 다졌다면, 이창호는 그 위에 금자탑을 쌓았다.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불리며 두각을 드러낸 이창호는 10대 시절 이미 국내외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기 시작했다.

그의 별명 ‘돌부처’는 표정 변화 없는 침착함과 절제된 수읽기에서 비롯됐다. 이창호 특유의 ‘반집승’ 전법, 상대 실수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집요함은 바둑 팬들 사이에서 새로운 교본과도 같았다. 승부사로서의 이창호는 흔들림 없이 확신에 찬 수를 두며 수많은 명승부를 만들어냈다.

바둑판 위에 바둑돌이 놓인 모습, 침착하게 수를 읽고 있는 프로기사의 손

스승과 제자: 배우고 넘어서는 관계

조훈현과 이창호의 관계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넘어, 한 시대의 상징이었다. 조훈현은 수많은 제자들을 지도했지만, 그중에서도 이창호를 특별하게 아꼈다. 반면 이창호는 스승을 존경하며 치열하게 실력을 가꾸었다.

두 사람의 성장기는 영화나 소설 못지않은 드라마를 가지고 있다. 1992년 조훈현과 이창호는 국수전 결승에서 맞붙었다. 이창호가 승리하면서, 사제의 세대교체가 공식화되었다. 당시 조훈현은 제자가 자신을 꺾는 순간을 지켜보며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두 사람은 바둑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인간적인 유대감으로 서로를 존중했다. 스승이자 라이벌로, 두 인물은 한국 바둑의 발전을 함께 이끌었다.

전설이 남긴 기록과 그 의미

조훈현은 세계대회 우승 11회, 국내 주요 타이틀 150회 이상을 차지했다. 이창호 역시 세계대회 21회 우승, 국내외 다수의 타이틀을 기록하며 바둑사에 금자탑을 쌓았다. 두 사람은 공동으로 한국-중국-일본 3국의 바둑 수준 향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둘의 대결은 언제나 바둑 팬들의 주목을 받았고, 각종 기록과 통계를 통해 아직도 회자된다.

바둑이 남긴 흥미로운 이야기들

두 사람의 일화는 바둑 팬들에게 오래도록 전설처럼 회자된다. 대표적으로 조훈현이 이창호를 처음 만났을 때, 어린 이창호가 조용히 바둑판을 응시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일화가 유명하다. 사범이었던 조훈현은 이미 어린 이창호의 눈빛에서 남다름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한편 1990년대 말, 국제대회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결승에 올라 서로 경쟁하던 모습은 한국 바둑의 자존심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또, 이창호가 어린 제자 시절, 조훈현 집안에서 묵으면서도 늦은 밤까지 혼자 묵묵히 복기(기보를 다시 보는 작업)하던 이야기도 바둑계의 유명한 에피소드다.

조용한 바둑 기원, 여러 명의 어린 기사들이 조용히 바둑을 두는 풍경

영화 ‘승부’와 현대적 재조명

2025년 개봉한 영화 ‘승부’는 조훈현과 이창호, 두 전설의 스승과 제자가 벌였던 치열한 승부와 인간적인 내면을 담아 화제를 모았다. 영화는 실존 인물들의 성장기와 맞대결 장면을 중심으로, 바둑이라는 스포츠의 속도감과 철학을 성공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결을 넘어 삶과 결단, 인간적 관계의 본질까지 섬세하게 포착해, 바둑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특히 영화 속에서 승부란 결과를 넘은 과정의 의미, 제자가 스승을 넘어서는 순간의 복합적인 감정들이 현실적으로 그려졌다. 실제 조훈현과 이창호가 쌓아온 역사와 대결, 그리고 그들이 남긴 유산이 궁극적으로 한국 바둑의 발전과 세계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다시 조명할 기회가 됐다.

조훈현과 이창호의 유산

조훈현과 이창호가 남긴 것은 단순한 승부 기록만이 아니다. 두 사람이 보여준 바둑에 대한 태도, 끝없이 갈고닦는 노력, 후배와 제자들에게 전한 정신적 유산은 한국 바둑의 미래를 보다 건강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 모두 은퇴 이후에도 후학 양성과 바둑 저변 확대, 사회적 소통에 힘쓰며 바둑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단한 인물들이 만들어낸 시대의 의미

조훈현과 이창호, 두 거장은 함께 그리고 때론 경쟁자로 바둑 역사를 이끌어왔다. ‘승부’라는 이름 아래 펼쳐진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단순히 바둑이라는 스포츠를 넘어, 인내와 열정, 그리고 성장의 가치까지 전한다. 이들의 대결과 협력, 각자의 길을 걸어온 과정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영감을 준다.

이처럼 조훈현과 이창호, 그리고 이들을 조명한 최근 영화 ‘승부’는 바둑 한판을 넘어선 시대의 상징이며, 여전히 한국은 물론 세계 바둑 팬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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