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긴장과 변화의 회오리
유럽을 뒤덮은 불안과 갈등의 씨앗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럽의 정세는 복잡한 동맹과 경쟁, 민족주의의 발흥,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얽혀 있었다. 영국은 해양 패권국으로 굳건했지만, 산업화의 속도를 높인 독일은 잉글랜드를 앞지르려 했다. 프랑스는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패배로 알자스-로렌을 빼앗긴 뒤 보복의 기회를 노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제국은 쇠퇴를 겪으면서도 남동유럽의 지배권을 붙잡으려 했다. 한편, 러시아는 슬라브 민족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발칸반도 진출을 도모했다.
이런 경쟁 구도 속에 유럽 강대국들은 무장증강을 거듭하고, 놀라울 정도로 촘촘한 동맹을 맺었다. 1882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가 삼국동맹을 결성하자, 프랑스와 영국, 러시아는 삼국협상으로 대응했다. 단단한 블록 체계가 완성되면서, 작은 갈등 하나도 걷잡을 수 없는 화약고가 되어 있었다.
촉매가 된 사라예보의 총성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세르비아계 청년에게 암살된다. 이 사건은 이미 익숙했던 긴장에 불을 붙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배후로 세르비아 정부를 의심했고, 독일이 단호한 지원을 약속했다. 세르비아를 지지하는 러시아는 군 동원을 시작했다. 독일은 러시아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로 진격한다. 영국 역시 벨기에의 중립 침해를 이유로 참전했다. 결국 불과 한 달 만에 유럽 주요국 모두가 전쟁에 휘말렸다.
참호와 소모, 서부전선의 교착
전쟁 초기, 독일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의 빠른 점령을 노렸다. 하지만 마른 전투(1914)에서 프랑스가 독일을 저지했고, 양측은 벨기에와 프랑스에 걸쳐 마주 보는 참호를 파면서 교착상태가 됐다. 이른바 “참호전”이다. 서부전선은 이후 양군이 수백 미터를 두고 끝없는 포격과 총격, 가스전, 새로운 병기 사용에 매달리는 소모전으로 변했다. 베르됭 전투(1916), 솜 전투 등에서 인명 피해는 극에 달했다.
동부전선과 세계대전의 확산
동부전선에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러시아와 직접 맞섰다. 타넨베르크 전투(1914)에서 러시아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전선이 넓어 오랜 기간 교착이 이어졌다. 남쪽 발칸반도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와 여러 차례 충돌했다.
한편 전장은 유럽에 머물지 않았다. 영국은 식민지 병력을 동원해 중동, 아프리카, 동아시아 등을 무대로 삼았고, 오스만제국도 1914년 말 동맹국 편에 참전했다. 갈리폴리 전투(1915)와 중동전 등 비유럽 지역에서도 치열한 격돌이 벌어졌다.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을 명분 삼아 독일 조차지를 점령했고, 전쟁의 범위는 말 그대로 ‘세계대전’으로 확장되었다.
대량학살과 신무기의 등장
제1차 세계대전은 이전과 차원이 다른 무기와 전술, 심각한 인명 희생 규모를 보였다. 독가스가 처음 사용되고, 중기관총, 전차, 항공기, 잠수함 등이 실전 배치됐다. 독일의 U보트 작전은 영국 해상을 봉쇄하면서 수많은 민간 선박을 침몰시켰다. 이런 무자비한 전쟁 방식은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큰 피해를 남겼다.
민중의 불만과 내부 변화
전쟁이 길어지자 각국 내부에서는 불만이 들끓었다. 너무 많은 남성이 전장에 나가고, 물자 부족과 인플레이션, 식량난, 반전 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전쟁 부담과 정치적 무능이 맞물려 1917년 2월 혁명,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연이어 일어났다. 러시아는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공식적으로 전선에서 이탈하고, 독일과 휴전했다. 이로 인해 독일은 동부 전력의 상당 부분을 서부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국의 참전, 전세의 대전환
1917년,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지마 선급(독일의 멕시코 유인 사건) 등이 미국을 자극했다. 윌슨 대통령은 민주주의 수호와 세계 질서 재건을 내세워 미국 참전을 선언했다. 신선한 미군의 대규모 투입과 물자 공급이 시작되자, 전쟁은 서서히 연합국 쪽으로 기울었다. 독일과 동맹국의 내분도 가속화됐다.
전쟁의 종결, 그리고 새로운 세계
1918년 11월, 독일 내에 시작된 혁명과 내부 붕괴로 카이저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독일은 휴전을 선언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제국 등 전통의 제국들도 연이어 막을 내렸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어,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 영토 상실, 군사력 축소 등 혹독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제국 등은 해체되어 각국의 독립 국가들이 탄생했다.
전후 유럽의 재편과 사회 변화
전쟁은 참혹한 상처만 남긴 것이 아니었다. 유럽의 왕국과 제국은 몰락했고,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일본, 미국이 국제질서를 논의하는 시대가 왔다.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 창설되었으나, 미국조차 최종 가입하지 않아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인플레이션, 빈곤, 실업이 뒤따랐고, 사회적으로는 여성과 노동자, 청년층의 역할이 오히려 커졌다. 예술과 사상에서도 낡은 체계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흐름이 등장했다.
주요 국가의 입장을 다시 살펴본다면
- 독일은 급부상한 신흥강국으로 더 많은 몫을 요구했다. 외교로는 한계가 있어 군사력에 의존했고, 영국과 프랑스에 맞섰다.
- 영국과 프랑스는 기존 식민지와 해양 질서를 수호하려 했으며, 서로도 신경 쓰는 사이였다.
- 러시아는 슬라브 민족주의와 발칸 진출이 목표였다. 전쟁 중 사회주의 혁명이 본격화되어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제국은 낡은 체계를 지키려 했지만 민족 갈등과 분열로 해체됐다.
- 미국은 처음에는 중립이었으나, 대외 전략과 경제적 이해관계로 기운 뒤 전쟁에 뛰어들었다.
유산과 오늘에 남은 의미
제1차 세계대전은 군사적 충돌 그 이상의 변화를 안겨줬다. 각국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고, 유럽의 힘은 약화됐다. 전쟁 경험은 이데올로기, 정치, 경제, 사회 구조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베르사유 조약이 남긴 반감과 경제 불안은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단초가 됐다. 오늘날까지도 세계를 해석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