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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그 흐름과 이면의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그 흐름과 이면의 역사

1차 세계대전의 그림자와 새로운 세계 질서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유럽은 말 그대로 폐허가 되었다. 강대국들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모색하려 했지만, 각자 엇갈린 이해관계와 복수심이 뒤섞여 있었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막대한 배상금과 가혹한 군사 제한을 강요받았다. 패전국에 굴욕을 안긴 이 조약은 결국 독일 내 불만과 분노를 부추겼다.

한편, 미국과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국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윌슨 대통령의 ‘14개 조항’에서 표현된 이상주의적 국제질서를 꿈꿨지만, 실제로는 내정 간섭을 최소화하려 했다. 프랑스는 독일을 최대한 억누르기를 원했고, 영국은 유럽 평형의 지속을 바랐다. 러시아에는 1917년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부가 들어서 새로운 긴장감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불안정한 세계 경제가 시작됐다. 1929년에는 미국발 대공황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실업, 빈곤, 절망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점차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에 기대게 됐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기와 히틀러의 등장

1차 대전 패전 후 탄생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친민주적이었으나, 끊임없는 경제 위기와 정치적 혼란에 시달렸다. 하이퍼 인플레이션(1923년), 대공황(1929년)이 겹치면서 국민 대다수가 생존에 내몰렸다.

이런 혼란의 틈을 타서 베테랑 전사와 급진주의자들이 정치 무대로 등장했다. 아돌프 히틀러도 그 중 한 명이다. 히틀러는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의 평범한 인물이었다. 미술학교 지원 실패 후 뮌헨에서 도피생활을 하다가, 1차 세계대전에 자원 입대했다. 전후, 민족주의적 성향의 독일노동자당(DAP)에 들어갔고, 탁월한 웅변과 선동 능력으로 빠르게 당의 중심이 되었다.

히틀러는 독일민족의 위대함을 강조하며,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공산주의·유태인 등 특정 세력에 모든 책임을 돌렸다.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 즉 나치당을 이끌던 그는 1933년 1월 결국 합법적으로 수상직에 올랐다. 이후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반대세력을 숙청했고, 대통령 힌덴부르크 사망 후엔 ‘총통’(Führer)이라는 지위로 독재 권력을 쥐다.

전운이 깃들다: 히틀러의 확장 정책

히틀러 취임 후 독일은 군대를 대대적으로 재건하고, 라인란트 재무장(1936), 오스트리아 합병(안슐루스, 1938),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란트 합병 등 지도를 바꿔 나갔다. 이런 행동에 영국과 프랑스는 애써 무마하며 유화정책을 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걸 극도로 피하려 한 것이다.

한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 일본 등도 각자 팽창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에티오피아)에 진출했고, 일본은 만주를 침공해 중일전쟁으로 확대했다.

폴란드 침공, 전쟁의 시작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은 비밀리에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두 나라는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셈이었다.

황폐해진 폴란드 시골 풍경, 잿빛 하늘 아래 휩쓸린 마을들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에 대항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세계 2차 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폴란드는 양쪽에서 독일과 소련에 협공을 당했고, 불과 한 달 만에 지도에서 사라진다.

유럽 전장, 첫 단계의 모습

1939-1940년 이른바 ‘가짜 전쟁’ 기간, 서부전선은 한동안 잠잠했다. 그러나 1940년 봄,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빠르게 점령했다. 5월엔 대규모 전격전(블리츠크리크)으로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잇달아 침공했다. 프랑스는 당시 최첨단 마지노선을 믿고 방어했으나, 독일군이 벨기에를 우회하며 치명타를 입혔다.

한편 영국군과 프랑스군 수십만 명은 덩케르크에서 영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은 허를 찌른 공습과 해상봉쇄 속에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대서양 공방과 공중전

1940년 여름, 독일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개시했다. 전투기와 폭격기가 런던 등 주요 도시에 폭탄을 퍼부었다. 영국은 낙관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레이더 등 신기술과 국민 결집, 처칠 총리의 리더십, 미 공군 지원 등에 힘입어 독일 공군을 막아낸다. 이는 독일의 첫 번째 결정적 패배였다.

동쪽의 불씨: 소련 침공

1941년 6월, 독일은 돌연 소련을 침공한다(바르바로사 작전). 두 동맹국은 사실 이념도 완전히 다르고, 확장적 야망도 달랐다. 독일은 소련의 넓은 영토와 자원, 특히 남부의 우크라이나·스타브링그라드·코카서스를 노렸다.

초반에는 독일군이 빠르게 진격했다. 그러나 소련의 넓은 영토, 혹독한 겨울, 치열한 국민 항전과 소비에트 체제의 집결력이 독일 진격을 멈추게 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은 결정적 패배를 당한다. 이 전투 이후 전쟁의 주도권이 서서히 연합국 쪽으로 넘어간다.

일본의 확장과 태평양 전쟁

한편,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중국 내륙까지 진출했다. 미국과 영국, 네덜란드 등 서구 세력은 이에 경제 제재로 대응했다. 일본은 자원 확보를 위해 동남아와 남태평양 지역 진출을 꾀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미국 하와이주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다. 미국은 즉각 일본, 독일, 이탈리아에 전쟁을 선포한다. 태평양 전선이 열리면서 세계 대전은 진정한 ‘전 세계 전쟁’이 된다.

전쟁의 고비, 중요한 전투들

북아프리카 전역

이집트, 리비아 등지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연합군과 영국군이 맞붙는다.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 세력이 밀려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소련의 고도인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2차 세계대전 최대 규모의 시가전이다. 양측 사망자와 부상자가 200만 명 이상에 달한다. 소련이 승리하며 독일군이 후퇴하는 계기가 된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1944년 6월 6일, 서유럽에서 결정적 전환점이 온다. 미국·영국·캐나다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다. 대규모 인명 피해와 치밀한 준비, 수많은 희생 끝에 파리가 해방되고, 독일은 서쪽에서도 수세에 몰린다.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하는 연합군 병사들

전쟁의 종식: 베를린 함락과 히로시마

1945년 4월,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격해 도시를 장악한다. 히틀러는 벙커에서 자살한다. 5월 8일, 독일은 공식적으로 무조건 항복한다. 유럽 전선의 전쟁이 끝났다.

태평양에서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다. 미국은 오키나와 전투를 거치며 본토 침공 위험을 검토했고,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소련 역시 만주에서 일본군을 공격한다. 결국 8월 15일 일본은 항복을 선언한다.

전쟁 뒤의 세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과 아시아는 다시 한 번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독일은 연합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고, 수도 베를린도 네 갈래로 나뉜다. 일본 역시 미군 점령 아래 개혁과 헌법 개정을 맞았다.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기 위한 기구로써 유엔(UN)이 창설된다. 이는 전쟁 방지와 국제 협력을 목표로 했다. 한편, 미국과 소련이 세계의 두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며 냉전이 시작된다. 동유럽을 포함한 여러 지역이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독일 역시 동서로 나뉘게 되었다.

유럽 여러 국가는 경제 부흥을 위해 미국의 마셜 플랜 지원을 받는다. 일본은 산업 구조 개혁과 민주 제도 도입 등 큰 변화가 일어났다. 사회적으로는 전쟁의 참상과 홀로코스트 등 인류에 대한 성찰이 폭넓게 이뤄진다.

2차 세계대전을 만든 원인들과, 각국의 동기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반발, 경제적 위기, 민족적 자존심 회복의 욕구가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재무장된 독일을 상대하길 꺼렸으나 도리가 없어 전쟁에 뛰어들었다. 소련은 초반엔 독일과 이해를 맞추다가, 곧 독일 침공을 받으면서 전력을 다해 싸운다. 미국은 원래 중립을 지키다가 일본의 도발로 참전했고, 일본 역시 자원 확보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꿈에서 움직였다.

각국은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또한 전후의 국제 질서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고심하며 행동했다. 세부적으로는 국내 정치, 경제 불안, 식민지 정책, 인종 이데올로기 등 다양한 복합적인 동기가 있었다.

전쟁이 남긴 유산

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남겼다.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7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전 세계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분야에 흔적을 남겼다. 전후 새롭게 정의된 인권과 평화, 그리고 책임의식이 이후의 국제 사회를 이끌어간다.

냉전 체제, 핵무기의 등장, 탈식민지화, 유럽통합 같은 주요 흐름도 결국 2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세계가 다시는 이 같은 참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떤 길을 걸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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