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정부, 그리고 AI: 기술과 공공영역의 기대와 현실
실리콘밸리 혁신가들의 정부 체험: 이상과 현실의 간극
기술 스타트업 창업자와 엔젤 투자자, 그리고 초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이름이 알려진 Sahil Lavingia가 얼마 전 짧지만 인상적인 정부 경험기를 공개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 산하 임시 조직인 DOGE(Department of Government Efficiency)에서 55일간, 자원봉사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그의 이야기는 실리콘밸리의 민첩한 혁신문화와 미국 연방정부, 특히 47만 명이 근무하는 재향군인부(VA)라는 거대한 관료 조직 간의 차이에 관한 관찰로 가득하다.
DOGE는 정부 효율화와 비용 절감이라는 목표 아래 정부 각 부처의 비효율 개선 컨설팅을 제공했다. 흥미로운 점은, Lavingia가 정부에 들어와서 느낀 ‘덜 비효율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대기업과 비슷하게 “회의는 많고, 결정은 더디다”라고 평했다. 하지만 대다수 실리콘밸리인들이 흔히 상상하는 ‘관료적 무기력’보다는 실질적으로 돌아가는 면이 있다고도 했다.
특히 관료적 해고 절차의 엄격함과 조직 내 규정(재향군인 여부, 근속연수 등)에 충격을 받은 부분도 있다. 퍼포먼스를 우선 판단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은 실리콘밸리 기업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의 역할 중에는 “불필요한 계약 평가, 사람 감원 대상 찾기”가 있었지만, 현장의 일처리가 단순히 외부자 시각처럼 ‘낭비만 가득’하지는 않았다는 후기도 있었다.
DOGE 자체는 IT 스타트업의 개발팀과 달리 표준화된 작업지침조차 없고, 엔지니어 간 지식공유가 드물었다고 한다. 개별 엔지니어들이 매번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만드는 상황이 반복됐다는 지적도 있다. 한편, 자발적으로 참여한 그는 자신의 성과 일부를 오픈소스로 공개했다. 예를 들어, 계약서 데이터를 LLM 기반 도구로 분석하거나 다양한 사내 문서에서 특정 키워드를 자동 검색, 추출하는 툴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규모가 큰 개선 프로젝트들은 조직 승인을 얻지 못해 실제 배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DOGE의 위상도 형식적이었다. 실질적 결정권한은 각 부처 수장이 가진 상황에서 컨설팅 조직 DOGE가 일종의 ‘비난받는 방패’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내부 불만도 적지 않았다. 정부 안팎 모두에서 외부참여자에게 기대를 걸면서도, 구조적 변화는 쉬이 일어나지 않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AI 산업에서 드러나는 미국의 전략적 긴장
Nvidia 실적보고가 공개되면서, 미 정부의 AI 반도체 수출규제가 끼친 영향도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Nvidia는 2025년 1분기 실적에 총 45억 달러(약 6조 원) 규모의 직·간접 손실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H20 AI 칩을 중국 기업에 판매하려다 미국 정부의 추가 허가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번 분기 미출하 실적만 25억 달러, 다음 분기에는 수출제한 탓에 매출 80억 달러 감소가 예상된다는 설명도 나왔다.
중국은 대규모 AI 연구시장을 품고 있다. Nvidia CEO 젠슨 황은 중국이 “세계 인공지능 연구자 절반이 몸담은 시장”임을 강조하며, “AI 주도권은 중국 플랫폼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의 규제가 자사 사업에 치명상을 입혔지만, 그는 장기적으로 “미국 기술이 중국을 배제하는 사이, 중국 로컬 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얻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내비쳤다.
여기서 중요한 맥락은 글로벌 AI 산업 경쟁 구도다. 미국의 칩 수출 통제가 세계시장 점유율 방어에 얼마나 실효적인가, 그리고 중국 시장 진입을 잃는 것이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미국 기술기업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 아닌가라는 논의다. Nvidia 사례는 단순한 매출 감소가 아니라, AI 플랫폼 지배구조와 기술 표준 경쟁, 그리고 지정학적 긴장이 결합된 복합적 현상이다.
최근 미국 정부가 바이든 대통령 시절 추가 제한을 검토했던 ‘AI 확산 규칙(Artificial Intelligence Diffusion Rule)’을 철회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이는 산업계의 반발, 그리고 AI 생태계에서 미국 기업의 입지를 유지하려는 현실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AI와 사이버보안, 민간과 정부의 접점 실험
AI 기반 사이버 보안 스타트업인 Horizon3.ai가 새로운 자금조달에 성공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2024년 5월 현재, NEA가 주도한 라운드에서 1억 달러 가운데 최소 7300만 달러를 유치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회사 가치는 7억5000만 달러 수준으로 추정된다. 창업 5년 만에 연간 3천만 달러 매출에 이른 셈이다.
이 스타트업은 미군 특수전 부대 출신 사이버 전문가와 전통적 엔지니어, 실리콘밸리 출신 창업가가 결합한 하이브리드형 조직이다. 최근 연방정부(미국 내 정부기관)에 제품 공급 인증(FedRAMP)까지 받아, AI 자동화 기반 보안 솔루션의 공공시장 진출 역시 예고했다.
Horizon3.ai의 주력 기술은 인간의 손길이 개입되지 않아도 자동으로 해킹 취약점을 찾아내는 ‘자가 모의해킹(autonomous penetration testing)’ 도구다. 최근 들어 AI 기반 자동 공격기술이 급증함에 따라, 그에 맞서는 방어 솔루션 역시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NEA가 1개월 사이 2건의 대형 사이버보안 스타트업 투자를 집행한 것은 그만큼 AI와 보안이 실리콘밸리 투자 사이클에서 비중을 크게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대목에서 실리콘밸리 기술기업이 공공영역과 맺는 관계에 대한 의문점도 생긴다. 정부 기관이 외부 기술기업에 점점 더 의존하는 쪽으로 이동할수록, 기업들은 공공부문을 중요한 매출처이자 테스트베드로 여기게 된다. 동시에, 정부가 AI·보안스타트업을 채택하면서 사회 전반의 기술적 위험 또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진다.
정부, AI, 그리고 기술인의 역할: 한계와 가능성
정부와 AI, 첨단 보안 기술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최근의 사례들은 명확하게 보여준다. 실리콘밸리의 혁신 인력들이 공직이나 공공업무에 참여할 경우, 기대치는 항상 높지만 실제 전달되는 변화는 제한적이다. 규정, 결정 권한, 예산 체계 등 구조적인 한계를 뛰어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이런 시도 자체가 공공 분야의 문제를 산발적으로나마 드러내고, 기존 경계와 역할을 재설정하는 계기가 됐다.
한편, 공공정책 결정과 AI 산업의 이해관계가 엇갈릴 땐 국가적 전략과 글로벌 시장 질서 조정이라는 복잡한 과제가 등장한다. Nvidia가 겪은 수출규제 사건은 단순히 한 기업의 손해 그 이상을 말한다. 기술 표준의 확산, 전략적 파트너십, 그리고 누가 미래의 플랫폼을 주도할지에 관한 치열한 기싸움이다.
스타트업의 공공시장 진입 역시 민간 혁신이 공공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그러나 매우 복잡한 조정과정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 점을 보여준다. AI 기반 보안 기업이 정부기관을 고객으로 확보하는 상황은 앞으로 더 자주 목격될 전망이다. 각 기술 분야와 공공영역 접점에서 지속적으로 실험과 도전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기술혁신과 공공영역의 접점에서는, 거대한 관성체계를 가진 정부와 현장을 빠르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민간 기술인 사이에 복합적인 긴장이 존재한다. 한쪽은 현상유지의 논리와 구조를 지키고, 다른 한쪽은 속도와 효율, 혁신을 중심가치로 내세운다. 각자의 한계와 강점을 인정하며, 서로의 언어와 방식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해법이 조금씩 생겨난다.
무엇보다, AI·반도체·보안기술이 산업과 정부를 이어주는 매개라는 점,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한 가운데서 누가 의사결정을 내리고 어떤 균형을 택하느냐가 앞으로의 중요한 변수가 된다. 기술은 개발만큼이나, 그 기술이 실제로 현장에 적용될 때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